영화에비친세상

퍼시픽 림(Pacific Rim, 2013)

센타우리인 2013. 8. 4. 23:55

 

 

제목: 퍼시픽 림(Pacific Rim, 2013)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

출연: 찰리 헌냄, 이드리스 엘바, 키쿠치 린코

 

 짧은 휴가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항상 그렇지만 놀고 난 뒤에 오는 허함은 무엇으로도 메꾸기 힘들다. 열심히 놀았다면 또 내일부터 새로 시작되는 내 삶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설국열차도 많이 끌렸지만 퍼시픽 림은 이제 극장에서 내려올 날이 머지않았으므로 이 영화를 봤다. 설국열차는 다음 주 혹은 다음 다음 주에라도 볼 기회가 있겠지. 뭘 하고 놀았든, 아무리 여행을 알차게 다녔어도 책 읽지 않는 휴식은 의미가 반감되는 것 같다. 1년도 넘게 내방에서 뒹굴고 있는 백경을 언제 쯤 다 읽을 수 있을까..

 

 퍼시픽 림은 얘기를 하자면, 이 영화는 그 자체로는 존재가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초의 거대 로봇 쟝르는 이미 프랜스포머가 차지 했고 괴수 영화는 이미 십년도 넘은 옛날에 "고질라"라는 전설적인 헐리웃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렇게 고질라 라든가 트랜스포머로 설명될 수 없는 낯익는 장면들과 만나게 된다. 비오는 홍콩거리는 분명 블레이드 런너의 이미지와 중첩되고, 드리프트 라는 기체와 조종사간의 교감은 에반게리온의 싱크로와 중첩된다. 즉, 퍼시픽 림은 SF의 기념비적인 영화들의 이미지를 끌어다 태연하게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 이 영화는 벌써 일반적인 헐리웃 영화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있다. 만약, 스케일로 보나 완성도로 보나 CG에 천문학적 액수를 뿌렸을 텐데 인지도 있는 배우 한명쯤 캐스팅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배우에 집중하는 시간을 스토리에 집중하게 되는 이점도 있으니 넘어 가는게 좋겠다.

 

 트랜스포머가 회를 거듭할 수록 불만스러운 점은 바로 사운드였다. 거대한 로봇들이 종이비행기처럼 움직이는 것도 물리법칙에 맞지 않느데다가 그 가벼운 양철 음향효과가 영화의 CG를 다 갉아 먹었다. 퍼시픽 림예게 사운드 면에서는 트랜스포머 제작진들이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일본은 핵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지구 상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나가시마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은 수많은 인명과 함께 2차대전 패전의 멍에를 일본에게 지웠다. 우리가 민족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직도 냉전시대로 논리에서 정치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처럼 일본은 핵에 대한 공포가 오히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가장 노출되어 있는 지대에 살면서도 핵발전소 같은 핵 시설을 건설하는 자제가 트라우마를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같기도 하다. 퍼시픽 림의 괴수 '카이주'의 원형인 고질라도 핵에 대한 일본인의 공포가 만들어낸 허상이고, '예거'의 원형인 에반게리온도 일본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핵 공포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면 된다. 에반게리온의 네르프는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폭격의 대한 일본인들의 공포를 반증한다. 암튼 이러한 핵에 대한 공포는 애니를 포함한 여러 문화쟝르에서 변형되어 나타나는 데, 퍼시픽 림은 그러한 일본 문화의 헐리우드적인 차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예거와 카이주가 등장하는 신에서도 어김없이 비가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CG완성도에 자신이 없어서 라기 보다는 많은 과거의 SF영화들이 비가 오는 굳은 날씨를 선호한 미쟝센의 오마주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비가 몰아치는 험악한 날씨는 극적인 대결을 더 절박하게 만든다.

 

 이렇게 이글을 마무리하면 러시픽 림이 무슨 큰 이정표를 세운 영화냐..라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렇게 대단한 영화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블레이드 러너의 이미지에 에반게리온의 거대 로봇, 고질라의 괴수, 거기다가 트랜스포머의 차원 포털-뭐라 마땅한 이름이 기억 나질 않아서-까지 비벼놓은 짬뽕같은 영화가 퍼시픽 림이다. 트랜스포머가 밝고 화사한 유머러스한 분위기라면 퍼시픽 림은 암울하고 비오는 절망적인 미래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또한 이 영화는 SF매니아들이 열광하는 전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도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