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작가(The Ghost Writer,2010)
감독: 로만 폴란스키
배우: 이완 맥그리거, 피어스 브로스난, 킴 캐트롤, 올리비아 윌리엄스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은 저렇게 보여야 된다. 위 사진처럼 대도시의 군중속에서 알수없는 적에게 쫓기는 초췌한 얼굴의 주인공. 쫓기는 이유
도 알 수 없다. 가능하면 날씨도 차갑고 우울해서 몸이 움츠려들면 더 좋고 좌우를 살피다가 지하철이나 버스의 문이 닫히기 직전에 순간적으
로 올라야 한다.
아마도 내가 본 최초의 스릴러 영화는 히치콕 영화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릴때 TV에서 자주 방영해주었으니까.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서 캐리 그랜트가 벌판에서 비행기에 쫓기는 모습이나 '이창'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기브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아 망원경으로 건너편 건물
창문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모습은 아마도 영화를 잘 모르던 어린 시절에도 한번 쯤은 TV에서 보지 않았었을까.
그러나, 그런류의 영화들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그것들이 얼마나 유명한 장면들인지 알게 된 순간부터도 한참이 지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말로 하면 나이가 들면서, 좋은 말로 하면 본 영화들의 숫자가 많아질 수록, 영화에서 취할 수 있는 정보가 많아진다.
처음에는 이야기 즉 스토리 텔링만이 유일한 감상 기준이다가
다음엔 음악, 그 다음엔 화면(미쟝센느)까지 감상 기준이 넓혀 진
다. 최근엔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모든 기준들이 동시에 내게 얘
기를 걸때도 있다. 마치 교향곡을 들을때 이쪽에선 현악파트 다
른 한쪽에선 관악파트가 동시에 귀에 들어와 간질거리고 혹은 울
부짖는 것과도 비슷하다. 왼쪽의 사진은 '유령작가'에서 영국의
전 수상인 애덤 랭의 자서전 집필을 돕기 위해 고용된 유령작가
(아마도 대필작가를 말하는 것 같음)가 그의 저택 집무실에서 그
가 쓴 초필본을 읽는 장면인데, 오른 편에 보이는 것처럼 유리벽
이 있어 밖을 볼 수 있다. 저런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
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보는 내내 들었다. 돈 몇천원
내고 저런 장소나 그 주변 풍광들 볼 수있는 것은 재밌는 스토리
를 떠나 요즘의 내가 영화를 보는 큰 이유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한 10분정도 영화관에 늦게 도착하여 유령작가가 랭의 저택으로 가게 되는 발단 사건을 보지 못했고,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관계
로 중간중간 잠이 드는 바람에 영화의 스토리를 충분히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화보기에는 관객 자신의 컨디션은 정말 중요하다. 위와 같
은 이유로 이야기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유령작가'의 짜임새가 아주 조밀하지는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폴란스키의 지난 스
릴러물 '나인스 게이트' 보다 더 엉성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릴러 보는 재미를 전혀 주지 못하는 영화는 물론 아니다. 예를 들면 저택
밖의 '반(反) 애덤 랭' 시위대 때문인지 작가가 조용한 자신의 호텔로 가려는 장면에서 비가 와 걸어 가기를 포기하고 차고에 있는 랭의 차를
몰고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네비게이션 음성이 자꾸 자신의 호텔 위치와는 반대를 가르키는 것에 짜증이 난 주인공이 뭔가를 생각한 듯 호텔
바로 앞에서 차를 돌려 네비게이션을 따라 가는 장면은 GPS가 일반화된 요즘 자연스러우면서도 독창적인 장치로, 요즘의 액션 스릴러 같은
정신없이 뛰고 치는 영화에선 볼 수 없는 옛날 스릴러물의 아기자기한 장치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경로취소를 하지 않고 시동을 끄
게 되면, 나중에 다시 네비를 켰을 때 그 경로가 남아 있게 된다. 무명 작가인 주인공이 BMW같은 고급차에 장착된 네비게이션 끄는 법을 모
른다는 설정도 자연스럽다.)
이런 류의 스릴러 영화(히치콕풍의 스릴러)의 주인공은 어드벤쳐 게임의 주
인공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우선 주인공은 원래 자신이 있던 공간에서
먼곳으로 여행이나 이주를 하게 된다. 새로운 공간이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위험
한 공간은 아니다. 야망의 함정(The Firm, 1993)에서 아내와 멤피스로 이사온 변
호사 미치 맥디어(톰 크루즈)에게 회사는 가난한 고학생 부부였던 둘에게 상류층
으로 갈 수 있는 통로이자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해 줄 안락한 공간이었던 것 처
럼 처음엔 유령작가 이완 맥그리거에게 애덤 랭의 저택은 업무를 위한 일상적인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야망의 함정에서 '미치'가 펌이 불법적인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 주변의 공간은 탈출해야 하는 고립된 공간으로 변하
며 주인공을 위협하게 되는 것 처럼, '유령작가'에서도 주인공이 애덤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랭의 저택과 그 주변은 탈출하고 싶은 고립된 공간이 되
고 자기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위협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정보 수집중인 케이트 워커(어드벤쳐 게임 'Syberia' 중)
이제 부터 주인공은 컴컴한 밤에 홀로 야간 투시경을 쓴 적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먼저 정보를 모아야 한다.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고 안심시키며 하나 하나 인터뷰하여 단서를 얻어야 한다. 주인공
과 주변 인물들간 두뇌게임의 시작이다. 주인공에 동화된 관객들도 어드벤쳐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감독과 탐정놀이를 시작한다. 감독이 이기
면 그 영화는 만족스런 결말로 끝나며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만, 관객이 이기게 되면 그 영화는 시시한 그저 그런 영화가 되는 것이다.
'유령작가'는 관객이 이긴 영화라고 해야 될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관객이 게임에 몰입하도록 하는데 실패한 영화라고 하는 편이 옳
겠다. 영화 홍보 문구처럼 정통 스릴러의 매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나지 않는 음악이라든가 강한 임팩트가 있는 장
치들이 부족하여 밋밋한 느낌이 난다. 각종 조미료에 길들여진 요즘
관객들 입맛에는 차지 않을 것이 뻔하다.
애덤 랭 역할의 피어스 브로스난은 이런 진지한 배역은 어울리지 않
는 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좀더 유머러스한 역할을 많이 한 탓인
지, 정적(政嫡)으로 부터 공격당하는 비굴한 노정치가의 연기로는 가
볍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역할은 안소니 홉킨스나 진 핵크만 같은 배
우가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완 매그리거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스타워즈 같은 블록 버스터 보다는 이런 영화가
더 편안해 보인다.
사실 이런 류의 스릴러 영화를 개봉관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다. 굳이
찾을려면 최근의 '셔터 아일랜드' 정도인데, 보기에 따라서 그로테스
크한 장면도 있고 후반에 강렬한 반전이 있어 같은 류로 보기는 힘들
다. '유령작가'의 이야기 구조가 조금만 더 밀도가 있었더라면 하는
정보수집하러 가는 유령작가의 뒷모습 아쉬움이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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