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귀향
감독: 조정래
배우: 강하나, 최리, 손숙
사실 이 영화를 볼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 겨울방학 봄 방학 등등 해서 엄청 길었던 고등학생 조카들의 동절기 휴가도 거의 끝나서 기념(?)으로 가까운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갈 생각이었는데 마땅한 장소를 못찾아 결국 제일 만만한 외출장소인 영화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틀 후가 삼일절이어서 그런지 '동주'도 보이고 '귀향'도 보였다. 윤동주를 생각하면 당연히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연습장 겉표지엔 거의 '서시'나 '별 헤는 밤'이 있었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 중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마음에 들었던 시는 '쉽게 씌어진 시'였던 것 같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네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락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저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동주는 꼭 일제 강점기의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서 아픈 것이 아니라, 내 청소년기 성장과정에서 어렴풋이 겪었던 아픔과 고독의 기억들과 닿아있어 아픈 것 같다. 그래도 귀향보다는 동주를 보는 것이 쉬울 것 같았는데, 조카들은 오히려 귀향을 골랐다. 아마도 얼마전 위안부 협상이 한일 양국간에 이뤄지면서 찬반양론을 비롯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면서 귀향의 내용에 관심이 갔던 모양이다.
영화는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었던 일제가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강제징용, 납치하여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로 삼았던 역사적 사실들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바탕하여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 관람전 혹시나 너무 잔인하거나 너무 사실적인 장면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꼭 짚어야 하는 내용들을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대체로 극영화라는 기본틀을 지키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오히려 영화가 시작되고 주인공 정민이 일본군에게 끌려가기까지 화면들은 너무 화사하고 느린 정극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전반부만 본다면 평범한 근대 시대극 영화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영화의 만듬새는 훌륭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제작비가 충분하지 않았을텐데 화면이라든가 조명이라든가 특별히 흠 잡을 곳은 없어 보였다. 다만, 영화 후반부 등에서 대규모 인원 동원이나 세트가 필요했을 것 같은 전투신이라든가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실제 인물인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너들'들을 재현하는 과정은 좀 더 현장감있게 좀 더 비장하게 그려졌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 만듬새라든가 화면이 어떻다든가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조정래 감독은 14년의 세월을 견디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제작비도 대부분 크라우드펀딩(SNS를 통해 소규모로 투자금을 모금하는 것)에 의해 조달됐다고 한다. 14년, 그 긴 세월동안 아마 영화가 완성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을테고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완성한다 하더라도 극장에 걸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을 것이다. 또, '뭘 그런 걸 영화로까지 만들어야 되나..' 그런 말도 많이 들었을 것이 뻔하다. 이런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와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듣고 있으니 감독으로선 감격스러웁기 그지 없을 것 같다.
지난 12월 28일 한일 양국은 위안부 보상에 대한 문제를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합의한다고 발표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작 가장 존중받아야 할 당사자들인 피해 할머니들의 의견은 소외되었다. 앞서 얘기한대로 조정래 감독은 피해자 할머니의 정신치료 과정에서 그려진 '태워지는 처녀들'이란 그림을 보고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고 한다. 2차 대전에서 패배가 확실해진 일본군은 범죄의 증거를 지우는 과정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국 위안부들을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처럼 살해하고 불에 태워 암매장하였다. 그런 비인도적이다 못해 악마적인 행위들이 전쟁 중이었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용인되거나, 시간이 지나 현시점에서 한일간 미래관계를 생각해 졸속합의 되었다면 꽃같은 나이에 지옥에서 죽어간 소녀들은 영혼조차 편히 쉬지 못할 것 같다. 영화에서 소녀들 주위로 나비들이 자주 등장하는게 나비는 죽은 소녀들의 영혼을 상징한다. 아주 오래전의 역사가 아닌 아직 그 희생자가 살아있는, 백년도 안된 세월전에 벌어진 비인간적이고 반인류적인 범죄의 역사적 기록이자 빨리 잊버리고자 하는 우리들의 편한 기억에 경종을 울리는 양심의 소리가 영화 '귀향'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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